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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칼럼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다병옹 김양선(多病翁 金揚善)과 탄옹 김경(灘翁 金澃)의 삶의 궤적을 통하여 역사를 해석하다.

이순락기자 0 2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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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다병옹 김양선은 1585년(선조 13년)에 10월22일에 선산김씨(들성김씨)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 석담 김석광(石潭 金錫光)의 아들로 태어난다. 다병옹 김양선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전에 태어났으며, 다병옹 김양선은 1616년(광해군 8)에 문과(대과)에 32세의 나이로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살펴보자면, 지금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시(考試)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사마시는 각 지방별로 소과(小科)를 치러 초시에서 보통 700명 정도를 선발하고, 이 합격자를 대상으로 복시를 치러 100명을 선발하여 합격자에게 백패(白牌)를 지급한다. 이 사마시 합격자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다시 수학한 후 대과(大科)에 응시하는데 통상 3단계를 거친다. 


우선 초시에서는 100명을 선발하고 여기의 합격자를 대상으로 복시를 치러 33명을 선발한다. 마지막 전시에서 33명을 성적에 따라 선발하여 홍패(紅牌)를 지급한다. 이 문과 급제자 33명은 갑, 을, 병의 등급에 따라 최초 임용 때 차등 임명하게 된다. 


이후 김양선은 전적(성균관의 정6품)·감찰(사헌부의 정6품)·형조좌랑(형조의 정6품)을 역임하고, 평안도 도사를 발령을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이후 경상감사를 보좌하는 경상도 도사를 맡아 벼슬을 하다가 도사 자리에서 물러난 뒤 처가인 경남 합천에서 여생을 마친다.


다병옹 김양선은 아버지가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을 지낸 석담 김석광(石潭 金錫光)인데, 종 7품의 직장(直長) 벼슬로 임금과 왕족들 옆에서 궁중의 크고 작은 살림을 사는 벼슬을 했기 때문에 다병옹 김양선은 서울 한양에서 태어났다. 


500~600년 전의 조선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에 대한 자료와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묘갈명(墓碣銘), 묘지문(墓誌文), 행장(行狀)정도의 미약한 자료만이 남아 있어, 짧은 글 속에서 다병옹 김양선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인간관계를 고려한다면 좀 더 다병옹 김양선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도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러한 사실들을 참고하면서 기술하고자 한다.


다병웅이 살던 시기는 1592년 임진왜란을 거치고, 광해군(光海君)이 집권을 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치권력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위기적 상황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속에서도 동서분당으로 인한 동·서인간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계속되며, 이 갈등과 대립은 일본이 강제로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  


선조(宣祖) 초기부터 사림세력들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여 왔다. 1575년(선조 8)에 신진 사림 출신의 김효원(金孝元)과 명종(明宗)의 왕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심의겸(沈義謙)이 조선시대 삼사(三司)의 관리를 임명하는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을 합친 이조전랑(吏曹銓郞) 자리를 두고, 갈등과 대립으로 결국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열되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난다. 


명종(明宗) 말기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게 되자, 사림파는 다시 등용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효원(金孝元)이다. 1572년 오건(吳健)이 김효원을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하자, 사림으로서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고 나왔다. 결국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자리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김효원은 2년 뒤,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이 되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었다. 이조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김효원이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沈忠謙)을 반대하였고, 김효원은 이발(李潑)을 이조전랑에 추천했다. 이때부터 사림은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갈등과 분열되기 시작했다. 김효원과 신진세력들은 서울 동쪽에 살았기 때문에 동인(東人), 심의겸과 구세력들은 서울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서인(西人)으로 불렀다.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선조 11) 좌의정, 1585년(선조 18)에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穌齋 盧守愼)과 이조판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동서분당의 갈등과 대립을 중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재는 잠시 동안만 이루어지다가 결국 동서인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극대화되어 갔다. 이후부터 조선의 주권이 일본에게 완전하게 빼앗기는 1905년 을사늑약 때까지 동서인의 갈등과 대립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붕당(朋黨)으로 인한 당파싸움을 제대로 보는 것이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동인에서는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누어지는 정치적 회오리는 임진왜란의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선조이후부터 왕위 계승 문제에 있어서 동인과 서인은 깊숙하게 관여하기 시작한다. 이 동서분당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왕은 이제부터 신하들로부터 선택되어지는 택군(擇君)의 시대로 접어든다.


다병옹 김양선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시기는 광해군 시대로 동인들 중에서도 북인들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소수의 북인들이 집권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 중 왜적에 맞서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서 자연히 조정(朝政)안에서 북인들의 입지와 영향력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시대 학문으로 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남명(南冥 曺植)의 다수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들이 배운 의(義)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과감히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리고 왜적의 퇴로와 병참을 차단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다. 그 대표적인 의병장들이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송암 김면(松菴 金沔)·이대기(李大期)·노순(盧錞) 등이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 다섯 명을 남명오현(南冥五賢)이라 부른다.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덕계 오건(德溪 吳健),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한강 정구(寒岡 鄭逑)이다. 동서분당이후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될 때, 조식의 제자들은 대부분 북인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영향권에 살고 있었던 다병옹 김양선은 이 정치적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당시의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관료와 백성들은 이러한 임진왜란과 정치적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서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삶을 살았던 다병옹 김양선의 삶의 궤적을 찾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번 시도해 보고자 한다. 점과 점을 연결하다 보면 선이 되는 것처럼, 사실과 사실을 잇다 보면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까운 해석이 나오리라 믿는다.

                             

다병옹 김양선의 조부(祖父)는 김공(金筇)으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 경연참찬관(左承旨經筵參贊官)을 정3품을 지냈다. 좌승지 경연참찬관은 품계는 정3품으로 높았지만, 관직은 낮았다. 여기서 김공은 신당 정붕(新堂 鄭鵬)선생의 아들 정의(鄭毅)의 딸과 혼인하여 석지(錫祉)와 석광(錫光)을 낳는다. 


여기서 필자는 성리학과 신당 정붕선생에 대한 언급을 짧게 나마 하고자 한다. 선산 금오산에서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으로부터 태동한 조선 성리학(性理學)은 입지적인 제자들의 출사(出仕)와 활약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학문은 서울 한양으로 옮겨 간다. 그러나 한양에서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에게서 공부한 신당 정붕(新堂 鄭鵬)은 성리학을 자신의 고향인 선산으로 다시 되가져 온다. 말하자면 조선 성리학의 발원지로 다시 성리학을 신당 정붕이 가져 온 것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은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퇴계 이황(退溪 李滉)으로 이어진다. 


영남의 성리학의 한축인 신당 정붕(新堂 鄭鵬) → 송당 박영(松堂 朴英)선생 이어지게 만들었다. 이후 신당 정붕의 성리학은 송당 박영(松堂 朴英)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 중종(中宗)이후 선산지역에서 송당 박영선생이 성리학을 발전·확산시키자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파평윤씨(坡平尹氏)가문의 대윤(大尹)·소윤(小尹)의 권력 다툼은 사림(士林)을 숙청하는 단계로 발전하는데, 그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 을사사화는 전국적으로 성장·확산되어 가던 송당학파(松堂學派)를 정조준하게 되어 화(禍)를 입게 된다. 


송당학파의 일원으로 을사사화의 화(禍)를 입은 사람은 야계 송희규(倻溪 宋希奎, 유배), 신재 김진종(新齋 金振宗, 유배), 주천 강유선(舟川 康惟善, 사형), 경응 안명세(安名世, 사형)였다. 이러한 을사사화로 큰 타격을 입은 송당학파는 분열과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송당 박영의 성리학에 대한 명성과 평가가 어떠했는가를 보자면, 1568년(선조 원년) 당시 사림파의 영수(領袖)이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이 송당 박영에 대해 극찬했을 정도이다. 이준경(李浚慶)은 “지금 모두들 도학하면 조광조(趙光祖)를 추존할 뿐이고, 박영·정붕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아는 이가 없다”고 당시 사림파의 편향된 분위기를 비판하였다. 


이준경의 신당 정붕과 송당 박영에 대한 평가가 이 정도라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명성과 실력이 얼마 만큼인지 모두들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종과 명종 때에 신당 정붕선생과 송당 박영 선생은 이미 신진 사림들 속에서 그 학문적 실력을 당당히 인정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 그리고 1589년(선조 22)의 동인(東人) 안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영남의 성리학적 사상계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로 양분되면서 선산지역의 송당학파는 구심점을 잃어 버리게 된다. 


동고 이준경은 중종 때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한편, 명종 때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훌륭한 명신들인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시켜, 조정에 다시 등용시키는 인물이었다. 


이준경은 본인이 죽기 직전 선조(宣祖)에게 “새도 죽을 때는 슬피 우는 법이라면서,  반드시 사림(士林)이 분열되어 붕당(朋黨)을 일으킬 것이니, 이를 경계하고 막으라.” 선조(宣祖)에게 충고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선조는 이준경이 죽으면서까지 이 간곡하게 절규한 충고를 그냥 흘려 듣게 된다. 


이준경의 충언을 간과한 결과 선조이후 조선의 역사가 기록되는 모든 정치적 사건들은 속에는 당파싸움과 붕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에 많은 훌륭한 선비들이 이 동·서인 갈등과 대립으로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남인이 주류를 형성하는 영남지역에서는 벼슬 길로 나가지 않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다병옹 김양선의 어머니는 광주이씨(光州李氏)이다. 여기서 광주이씨는 전라도 광주를 의미하며, 또 다르게 광산이씨(光山李氏)라고도 한다.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경기도 광주를 의미하며 광릉이씨(光陵이씨)라고 한다. 여기서 본관이 다르다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렇게 밝히는 것이다.


다병옹의 어머니 광주이씨는 봉사(奉事) 벼슬을 한 이응명(李應命)의 딸이고, 성주 윤동(倫洞)마을의 의성김씨(義城金氏)를 명문가의 초석을 놓고 다진 삼척부사(三陟府使) 칠봉 김희삼(七峰 金希參)의 외손녀이다. 이응명의 의성김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묘갈명을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찬(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는 남명 조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봉 김희삼은 1524년(중종 18년) 선산 들성마을의 진락당 김취성(金就成)에게 수학하기 시작했는데, 진락당 선생이 칠봉을 매우 의로운 사람이라 중히 여겼다고 한다. 훗날 칠봉이 월봉산 아래 서실을 진재(進齋)라 지었는데, 진락당 선생의 아우인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이 진재설(進齋說)을 지었다. 


칠봉이 1540년 문과에 급제하자, 진락당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급제를 축하하며, 이르기를 “다행히 큰 곳에 이르러 도를 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가 급제한 것 보다 낫도다.”라고 했고, 진락당 선생이 한번은 첩자(帖子)를 주었는데 “본원을 함양하는 공부는 진실로 중간에 끊어지기가 쉽다. 


그런데 막 끊어진 것을 깨달았을 때, 곧 거기가 이어야 할 곳이니, 이로부터 발분하여 이어나가기를 오래하면 자연히 천리가 밝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말로는 나타내기 어려운 오묘함을 마주 앉아 논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희삼이 호(號)를 칠봉이라고 붙인 데는 두 가지 설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칠봉산 밑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칠봉’이라 호를 스스로 지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느 날 임금이 신하들에게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다른 신하들은 모두 스스로의 소망을 말했지만 김희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이 재차 물으니, 김희삼은 말하기를 “소신의 집은 성산에 있는데 일곱 봉우리들이 앞뒤로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안에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벼슬에서 물러나 칠봉산 아래에서 나물이나 캐고, 물고기나 낚으면서 일생을 마치기를 원합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국왕은 김희삼에게 ‘칠봉’이라는 호를 내리면서, “나중에 거기 가서 살라”고 했다는 것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하자, 칠봉 김희삼과 동강 김우옹의 많은 자손들은 조선독립운동에 뛰어 든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다. 


심산 김창숙은 상해임시정부 부의장을 맡았으며, 해방이후 서울의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다. 안동뿐만 아니라 전국의 의성김씨 가문에서 한국독립운동에 삶을 희생한 사람이 약 200여명이나 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필자가 생각하건대 의성김씨는 한국최고의 명문가라 할 수 있겠다.  


칠봉 김희삼의 아들이 바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에게서 학문을 배운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이다. 김우옹은 대사헌(大司憲), 대사성(大司成), 부제학(副提學)을 거친 조선시대 최고의 관직을 두루 거친 관료이자, 학자였고, 동서분당이후 동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김우옹은 동서분당(東西分黨)이후 동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발생된 기축옥사 때 유배를 가게 된다. 김우옹의 중형(仲兄)인 개암 김우굉(開岩 金宇宏) 역시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을 거치면서 형제들이 전국적으로 대학자로 인정받았다. 


다병옹 김양선의 어머니인 광주이씨는 동강 김우옹에게 생질녀(甥姪女)가 되는 것이다. 요즘은 생질녀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다. 누나나 여동생의 딸을 생질녀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다병옹이 벼슬길에 나가 있을 때, 김우옹은 김양선을 무척이나 아꼈다고 한다. 김우옹은 특히나 다병옹 김양선이 문과 급제를 하여 벼슬 길에 나갔을 때 그에 대한 관심과 지지는 더 커져만 갔다. 


기록에 의하면 다병옹은 “성품이 총민하고 재기가 탁월하여, 겨우 여섯 살에 능히 글을 지어 많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며, 동강(東岡 金宇顒)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했으며, 생질녀가 좋은 아들을 두었다라고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여러 차례 과장(科場 : 향시(鄕試)를 보이는 시험장)에서 장원하여 명망이 더욱 넓고 높았으니 명예를 다투는 사람들이 다툴 줄을 몰랐더라.”라고 기록하는 것을 보았을 때, 다병옹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천재적 타고난 재질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다병옹의 사촌(從兄)형이 바로 선산 출신의 탄옹 김경(灘翁 金澃)이다. 기록으로 봤을 때, 탄옹 김경은 다병옹 김양선보다 3살 위이다. 탄옹 김경의 어머니가 선산의 신천강씨(信川康氏)인데, 극재 강경선(克齋 康景善)의 딸이다.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 강의(康顗)의 아들이 극재 강경선(克齋 康景善)·주천 강유선(舟川 康惟善) 형제들이다. 이 형제들은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의 제자들이었다. 탄옹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극재 강경선이다. 


강경선의 동생은 주천 강유선(舟川 康惟善)으로 송당학파의 일원으로 진락당 김취성에게 수학하였다. 기묘사화로 죽은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신원회복을 운동을 성균관 유생들과 노력하다가 을사사화 때 이홍윤(李洪胤)의 역모 사건에서 연루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는다.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이 바로 북저 김류(北渚 金瑬)이다. 김류는 인조반정 때 정사1등 공신에 책록되어 이조판서·좌의정·도체찰사·영의정의 벼슬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김류의 할머니가 바로 강의(康顗) 딸이다. 따라서 탄옹의 외할아버지와 김류의 할머니는 남매지간이 된다.


김류는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反正)을 꾀하지만 실패한다.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申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 반정의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반정의 주류들 사이의 갈등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행(南幸)하는 인조를 호가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우찬성을 거쳐 1624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김류는 임진왜란 때 탄금대전투의 신립(申砬)장군의 종사관의 직책을 맡은 김여물(金汝岉)장군의 아들이다. 김여물은 그의 외가인 신천강씨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탄옹 김경은 1617년(광해군 9)에 36세에 성균관 생원시 합격했다는 것을 보면, 다병옹은 이 보다 젊은 나이에 32세에 1616년(광해군 8)에 문과 급제를 한다. 탄옹보다 다병옹은 벼슬길에 일찍 나갔으며, 탄옹의 생원시 합격으로 성균관 입학하자, 다병옹은 서로 재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탄옹 김경의 할아버지 김공(金笻)과 아버지 김석지(金錫之)는 가족들과 함께 금오산 도선굴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전란의 와중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안타깝게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탄옹 김경의 어머니 신천강씨(信川康氏)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시아버지와 남편의 장례를 준비하던 중에 스스로 자결하게 된다. 


이 때 탄옹 김경의 나이 겨우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집안과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정성을 다해 치르고 마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도 모자라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탄옹 김경이 전쟁 중에 기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아가 된 탄옹 김경이 찾아 간 곳은 이모 집이었다. 여기서 탄옹 김경은 이종사촌들과 함께 공부하며 자라게 되었다.


탄옹 김경은 1629년(인조 5)에 3만의 후금군(後金軍)이 침입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난다. 김경은 의병(義兵)을 일으키는데, 때마침 후금과 강화가 체결되어 군사들을 파하게 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의 충성심에 대한 보답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어졌다. 이후 김경은 교하현감, 함흥부 판관, 호조좌랑을 거친다. 


탄옹 김경은 1637년(인조15년) 4월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김경은 1636년 일어나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인조의 호종을 아들 김하량과 함께 도왔다. 김경은 인조의 남한산성 호종의 공훈으로 죽은 이후 사헌부 장령(掌令)에 증직되고, 3년 후에는 승정원 좌승지와 호조참판을 증직 받는다. 


김경의 아들인 강탄 김하량(江灘 金廈樑)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의 제자로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2년 뒤에 문과(대과)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김하량은 안동부사·판결사(判決事)·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했다. 김하량이 죽은 이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경은 호(號)를 탄옹(灘翁)으로, 사촌동생인 김양선은 다병옹(多病翁)으로 각자의 호(號)에다 늙은이 옹(翁)을 붙인 것처럼 봐서는 종형제 사이에 남다른 우애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측과 생각을 필자는 한다. 


이들 종형제(從兄弟)들은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대북파가 서인과 남인들을 축출한 이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벼슬 길에 나갔다. 표현하자면 벼슬 길에 나갔지만, 본인들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주 살벌한 시기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벼슬길은 출세 길도 되지만, 반대로 죽을 수도 있는 길이었다.


다병옹의 어머니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광주이씨(光州李氏)이다. 조선시대 광산(광주)이씨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동암 이발(東巖 李潑)이다. 그러나 선조(宣祖) 때 사림 세력들이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될 때 이발은 동인(東人)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이발은 남명 조식의 제자들과 교류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발생된 기축옥사(己丑獄事)로 희생되는 대표적 인물이 광산이씨(광주이씨)의 이발이다. 정여립은 1571년 (선조 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했다. 


그러나 이이가 탄핵되어 물러나 죽게 되자, 동인의 정치세력이 우세해지자 동인으로 전향한다.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은 본인이 모셨던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서인의 영수격인 박순(朴淳)∙성혼(成渾)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여립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선조는 불신하고 멀리했다. 선조의 정여립에 대한 미움은 미움으로 그치지 않고, 관직을 삭탈하게 된다. 정여립은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서 활쏘기를 하는 대동계(大同契) 모임을 결성한다. 


이 대동계 모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전라도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그 왜구를 물리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누구보다 의심이 많았던 왕이었다. 관직이 삭탈된 신하가 왜구를 물리칠 정도의 군사력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역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여립은 서인들과 선조의 완전한 표적이 되어버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었다. 정철은 정여립을 역적으로 몰아 동인들을 제거하려는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 중 하나인 기축옥사를 만든다.


기축옥사를 주도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이발의 80세 노모와 10살 된 아들까지도 무참히 죽이는 무자비한 잔혹함을 보인다. 역사에서 가장 아이러니 하게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송강 정철이다. 정철이 주도한 이 기축옥사는 3년 동안 1000여명에 가까운 동인 관료와 선비들이 희생된다. 


이발(李潑)은 이조정랑(吏曹正郎)·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최고로 선망하던 벼슬이 이조정랑·부제학·대사간이다. 이발은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광주·광산이씨 사람들은 정철이 연일정씨(延日鄭氏)임으로 연일정씨와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제사지낼 때 고기를 썰거나 다질 때마다 송강 정철! 송강 정철! 하면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서인들은 원인 규명과 사태 파악보다는 역모사건을 빌미로 무자비하게 동인들을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한편, 서인들은 정치적으로 영구 집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김우옹도 동인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축옥사의 화(禍)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우옹 역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대사건은 다병옹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 길에 나가기 이전의 일이지만, 이러한 것들은 다병옹 입장에서는 자신의 앞날에 결코 좋지 않은 환경과 배경이었다.


1608년 북인들은 광해군(光海君)이 왕으로 옹립시키자,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져 갈등과 대립한다. 대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소북의 영수(領首) 류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대북정권은 또 계속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해서 1613년에 일어난 대사건이 계축옥사(癸丑獄事)이다.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그 아들 3명이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이 폐서인 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들이 조정에서 축출되고, 대북의 좌의정 정인홍(鄭仁弘)과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 계축옥사의 원인으로 결국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은 계축옥사가 도화선이 된 것이다.


인조반정(1623년)은 서인(西人)들을 중심으로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金瑬)·이괄(李适)을 주축이 되어 이이첨(李爾瞻)과 대북파를 숙청하고, 능양군 이종(綾陽君 李倧)을 왕으로 옹립하는 정치적 대사건이었다. 


이후 서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이해와 목적이 다른 인물들과 북인·남인을 조정에서 대거 숙청하거나 물러나게 했다. 계축옥사로 희생된 서인들은 다시 정치적 반작용을 광해군과 동인들에게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조반정이었다. 


기축옥사(1589년) → 계축옥사(1613년) → 인조반정(1623년)을 거치면서 35년간 동인과 서인 사이에 갈등과 증오는 계속 쌓여만 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다른 정파에 대한 대화와 배려·신뢰는 역사에서 완전하게 사라지게 된다.


이 갈등과 증오는 시간이 지나면서 벼슬 길에 나간 관료 뿐만 아니라, 전국의 향촌 사회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원인은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제자와 스승의 사승(師承)관계에 따르거나, 아니면 조상들이 동서인 사이에서 어느 붕당소속이었느냐에 따라 서로가 지향하는 길이 달랐다. 따라서 같은 가문과 집안에서도 동·서인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었다. 1905년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게 완전히 넘어 갈 때까지 이 갈등과 대립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집권하고 있던 세력들의 정치적 이념과 다르거나 당색(黨色)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동인에서 특히 남인들은 소과(小科)의 진사(進士)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아예 벼슬 길에 나가지 않았던 사대부들은 혼인(婚姻)관계로 신분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지역의 향교(鄕校)·서원(書院) 출입을 통해 그들의 신분을 유지하는 행태로 나타났다.


기록에 보면 다병옹 김양선의 성격과 기개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광흥부봉사(廣興副奉事)로 본 창에 있을 때에 녹을 헛되게 소비하는 폐단과 하급관리들의 남용과 도둑질하는 자를 색출하여 바로잡아 본 창의 재정을 좋게 하였다. 또 전적과 감찰을 역임하고 형조좌랑이 되어 법집행에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기록이 있다. 


그리고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모(廢母)시킬 때, 다병옹 김양선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지만, 폐모시키는 것을 만류하는 소(疎)를 올리는 것을 중지 시키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을 볼 때, 그의 강직함을 사람들이 지주(砥柱)와 같은 절조가 있다고 표현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지주(砥柱)란 중국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지주산(砥柱山)을 가리키는데, 황하가 범람할 때마다 탁류가 지주산에 부딪치지만, 지주산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우뚝하게 서 있는 것처럼, 난세에 선비들의 의연하고 초연한 높은 절개와 지조를 지주(砥柱)에 빗대어 선비들은 표현했었다.


1625년(인조 3년) 다병옹은 모든 관직과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다병옹이 인조반정 3년 후 관직생활을 포기한 원인으로는 집권한 서인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와 노선을 지향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할 있겠다. 


그리고 서인들이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관직 생활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병옹 김양선은 10여년의 관직 생활을 뒤로 한 채 벼슬 길에서 완전히 벗어났던 것이다. 


기록에는 “인조임금 초에 성백(成伯)을 시기하여 허위로 죄를 만들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있다. 여기서 성백은 다병옹 김양선의 자(字)이다. 이 기록을 봤을 때, 다병옹 김양선에게 어떠한 사건인지는 모르나, 분명히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것을 알 수 있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조반정의 중심 인물인 김류의 할머니와 탄옹의 외할아버지 관계를 봤을 때, 김류와 탄옹은 막역한 사이였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미루어 보건대 탄옹의 입장에서는 4촌 동생인 다병옹이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탄옹은 은밀하게 다병옹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탄옹 김경의 스승은 한강 정구(寒岡 鄭球)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었다. 탄옹은 장현광의 제자였다. 인조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그 정당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국의 훌륭한 학자들과 인물들을 조정에 등용하고자 했다. 인조가 그 중에서도 가장 등용하고자 했던 대표적 인물이 여헌 장현광이었다. 인조는 여헌 장현광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서울로 불렀다.


그때마다 장현광은 늙음과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가마와 마차를 보내고 심지어 탕약까지 장현광에게 보내어 왔었다. 장현광을 데려가고자 하는 인조의 마음은 한마디로 지극 정성이었다. 그래서 장현광이 그 성의에 보답하고자 인조를 만나러 한양으로 간다. 장현광은 인조를 만나고는 곧장 인조의 허락도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다.


탄옹 김경이 여헌 장현광의 제자였다는 것을 인조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조는 탄옹 김경을 눈 여겨 보았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기록에는 없지만, 여헌 장현광이 인조에게 탄옹의 앞날을 당부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필자는 해본다. 이러한 이유로 탄옹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서 나름대로의 위치와 영향력을 유지 할 수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런데 “병이 많은 늙은이”라는 다병옹(多病翁)으로 호를 가지고 있다.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자, 임금이 “다병옹”으로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모함과 시기가 많은 벼슬길에는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엿 볼 수 있는 호(號)라고 생각한다. 


다병옹은 경남 합천지역에 세거하던 철성이씨(鐵城李氏)와 혼인을 했다. 철성이씨는 고성이씨(固城李氏)라고도 한다.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이황(李璜)을 시조로 하는데, 고려 덕종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를 지냈는데, 1033년 거란군의 침입을 막아 철령군(鐵嶺君: 철령은 철성(鐵城)의 옛 이름으로 경상남도 고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철성이씨로 했다. 


그리고 조선 태종 때, 이원(李原)은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고, 대사헌, 우의정을 거쳐 세종 때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이원은 이진(李溍)의 7대조이다. 그래서 철성이씨와 고성이씨(固城李氏)와 같은 본관으로 볼 수 있다. 다병옹 김양선의 장인은 이진(李溍)으로 합천일대에서 막강한 재력을 소유한 재력가였다고 한다. 


다병옹 김양선의 묘지명에는 “늙어서 집에 있으면서 서책으로 스스로를 즐기고, 자제들을 가르치며 산업을 일삼지 아니하여, 다만 자급할 정도였지만, 자력에 의하여 살아갈 수 없는 곤궁한 사람을 보면 아낌없이 도와주어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니, 병란을 겪은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인사들이 많은 도움을 입었다. 재리(財利)에 있어서는 초연한 마음으로 겁쟁이처럼 피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병옹 김양선의 지인들이 난을 피해 다병옹이 거쳐하던 합천까지 피난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병옹 김양선은 1643년(인조 21년) 59세를 일기로 합천 처가에서 세상을 떠난다. 다병옹은 벼슬길에 물러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처가인 합천에서 생활했다. 다병옹 김양선이 세상을 떠나 지금의 고아읍 원호리 들성마을 웃골 뒷동산에 상여(喪輿)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웃골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상여가 동네에서 나가는 법은 있어도, 동네로 들어오는 법은 없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자, 상여가 반대편 산을 넘어 와서 묘소를 마련하였다고 전해진다. 


탄옹 김경과 다병옹 김양선 4촌 형제들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국가적으로 “바람 앞에 촛불”이었으며, 어느 누구에게나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은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가장 큰 국제적 규모의 전쟁이 잔인하고 가혹하게 한반도를 쓸고 갔던 시기였다. 


내부적으로는 사림(士林)이 분열되어 동서분당을 형성되고,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무차별적으로 가하던 살벌한 시기였다. 벼슬 길이 출세 길도 될 수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죽는 길도 되었다. 우리가 아는 조선 시대의 역사를 깊숙하게 알게 되면 비극적인 사건들과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필자는 탄옹 김경과 다병옹 김양선, 이 두 사람의 삶을 궤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정치적 환경과 배경을 알아보는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환경을 파악하지 않고, 역사 속의 한 인물 만을 탐구하는 것은 알맹이 없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필자는 많은 역사적 기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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