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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구미의 독립지사 운파 최관호 선생 서거 71주년 추모제 개최

이순락기자 0 4964

손자 최세훈 선생,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김종길 상임대표 등 100여 명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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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파 최관호 선생 제71주기 추모제, 전주최씨 인재공파 해평문중 종문 ~ 

2017년 10월 17일은 운파(雲坡) 최관호(崔觀浩, 1905~1946.10.17) 선생이 1946년 10월 “폭풍의 10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면에든지 7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날을 맞아 유족들과 지역의 시민, 사회단체 등 100여 명이 참석, 고인의 독립투쟁에 관한 역사적 사료에 의한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등 뜻 깊은 행사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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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파 최관호 선생의 종손 최세훈 선생(두루마기 차림), 뒷편에는 분권운동 구미본부 이수태 사무국장이 식순 안내하며 마이크를 최세훈 선생에게 건넸다 ~

이날 추모제에는 운파 최관호 선생의 종손자 최세훈 선생을 비롯한 유족 대표와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유족 대표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선생의 종손(從孫)인 여인성씨, 운파 최관호를 언론계에 소개하고 신간회선산지회 간사로 활동하기도 하면서 실질적으로 구미의 독립운동과 청년운동을 지도한 석우(石友) 채충식(蔡忠植, 1892~1980) 선생의 손녀 채영희 여사가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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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김종길 상임대표가운파선생  추모제에 관한 것과 구미의 독립지사들에 대한 설명을 하며 서훈 추서 등 정부의 적극적 조사와 선처를 요구하고 있다 ~

또한 민주당 구미을 지구당 장기태 위원장, 구미시의회 김근아 의원, 전 경북도의회 한기조 도의원과 민주당 소속 전 도의원 김창숙, 부산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 장세룡 교수,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상임대표 김종길, 사무국장 이수태, 전주최씨 인재공파 해평문중 최열 선생과 최선호 전 LG경북협의회 사무국장, 최재건 경운대 교수, 김종배 전 구미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비롯한 해평면 노인회장과 회원 등이 참석하고, 몽양선생기념사업회와 심산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조화를 보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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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양 여운형 선생의 증손 여인성 선생이 몽양과 운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초청해 주신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

운파 최관호 선생은 인재(訒齋)선생의 13세 주손(冑孫)으로 강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8월 19일 장천면 상림에서 고고(呱呱)의 성을 지르며 탄생하였다. 선생은 아버지 최종익(崔鍾翼)과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 자(字)는 섭(涉)이고, 운파는 그의 자호(自號)이다.
 
1927년 중국으로 망명한 운파 최관호는 이역만리 중국의 하얼빈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신문을 발간하고 이를 통하여 한·중양국의 단결을 호소하고, 독립을 향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민족각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장진홍 선생의 죽음에 자극받아 “민족이여 각성하라!!!”는 사설을 쓰고, 일제 경찰에 의해 구검되어 국내로 송환되고,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도 신간회 선산지회와 경북의 언론인들로 구성된 보도협조망에 참가하면서 구미와 선산이라는 완고하고 척박한 환경 아래에서도 구미의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면에서 이끌었고, 금오산 수리조합과 해평수리조합 반대운동, 구미면 · 선산면 · 해평면 · 장천면의 소비조합운동, 전기료 인하, 기근구제운동, 김천고보 설립 지원, 야학운동, 형평운동(衡平運動) 지원,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과 소년운동 지원, 중국이주동포 옹호, 브나로드운동 지원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지역의 독립운동과 근대화를 촉진하였다.

 

1944년 몽양 여운형 선생과 심산 김창숙 선생이 주도한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하였고, 이후 좌우합작운동, 남북단일정부운동, 선산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과 해방된 조국의 건국과정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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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근아 구미시의회 의원(왼쪽)과 김창숙 전 경북도의회 의원 ~

1946년 10월 17일 “10월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미군정 치하의 공권력에 의하여 희생되었으며, 재판 없는 즉결처분은 당시 해평지서 앞 농창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생은 억울하게 희생되었고, 그날 이후 70년 동안 역사 속에 묻혀져 있었다. (이상의 역사적 서술은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김종길 상임대표의 수집, 소장 자료에 의한 것을 인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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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모제 참석 주요 관계자 일동, 왼쪽 최선호 전 LG경북협의회 사무국장, 여인성 몽양 사업회, 10월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대표 일행과 채영희 회장, 운파 종손 최세훈, 전주최씨 인재공파 해평 문중 대표 최열,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상임대표 김종길, 장세룡교수(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참석한 참배객 앞에서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김종길 상임회장은 준비된 조사에서 “그러나 하늘이 그 날의 일을 알고, 땅이 그 날의 희생을 전했습니다. 보천탄이 그날의 신음을 들었고, 금오산과 베틀산과 냉산이 그날의 비극을 내려다보았으며, 나무도 풀도 수많은 증언자들이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그 날의 증인이 되었습니다.”고 비분강개하면서도 슬픔과 한에 맺힌 목소리로 낭독하여 모두의 가슴을 적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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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파 선생 묘소 맞은편의 동제 지내는 곳, 매년 정월 보름날 동제 후 아이낳기 원하는 사람이 첫새벽에 이곳을 찾았다고 하며, 처음 만난 사람이 남자이면 아들을, 여자를 만나면 딸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어 정월 대보름날 새벽녁에는 동네에서 여자들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함 ~

운파선생의 약력과 공적에 대해서는 전 경북도의회 김창숙씨가 발표했으며, 몽양선생기념사업회 여인성씨가 몽양 여운형과 운파선생의 관계 등에 대한 술회를 하였고, ‘10월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채영희 여사가 한맺힌 울부짖음으로 독립투쟁을 했던 고귀한 독립투사와 지사들이 이데올르기에 매몰되어 아직껏 조명 받지 못하고 이른 바 ‘빨갱이’로 내몰리는 한스러움을 토하여 한 마디 한 마디 듣는 순간 국민된 한 사람으로서도 부끄럽고 죄를 짓는 듯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운파선생 유족 역시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현충일과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바에 따라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있는 운파선생이 독립지사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판단으로 서훈을 받을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이번의 추모제에서도 간절히 나타내고 있었다.

 

이순락 기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9-01-03 09:33:36 태스트용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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