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해산(海山) 김정묵(金正默)을 찾아 한국독립운동사 속으로...
<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구미회(구미를 사랑하는 사람들)부회장,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해산 김정묵! 유림의 거목 한계 이승희의 제자가 되다.
해산(海山) 김정묵(金正默; 1888~1944)은 1888년 선산군 구미면 도량리에서 선산김씨 지역에서 일명 들성김씨 불리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산 김정묵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김해산(金海山)으로 활약한다. 해산 김정묵은 성주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인 한개마을의 영남유림을 대표하는 명문가 중 한 집이며,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에게 유학을 공부하게 된다. 해산 김정묵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념과 사상은 스승 이승희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이승희는 처음에는 호(號)를 대계(大溪)하다가 나중에는 한계(韓溪)로 고친다. 한계 이승희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한계 이승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다.
스승 이승희는 당대 조선 유학의 대미를 장식한 대학자 이진상(李震相)으로부터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어받았지만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이승희는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는 포고문을 작성하여 각국 공관에 보내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수백의 유생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목 베고 을사늑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이완용 등 5적신은 대한(大韓)의 강상(綱常)의 적(賊)이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천하강상의 적이니 이들을 목 베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채 1,300만 환을 보상해야 한다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성주지역 국채보상운동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07년 5월 5일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방해로 대한제국의 대표단이 참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예측하고 4월에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일본의 침략 만행을 폭로하는 편지를 보낸다.
절대로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
1908년 5월 이승희는 “절대로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뒷일을 제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에게 모두 맡기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떠난다. 그곳에서 이승희는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머물고 있던 이상설(李相卨)과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지휘했던 안중근(安重根)·유인석(柳麟錫) 등과 1909년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시작할 기지를 건설할 계획과 건설에 착수한다.
그리하여 이승희는 길림성 봉밀산(蜂蜜山) 아래 엄청난 황무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봉밀산을 답사하고 황무지를 매입한다. 이후 한인들 100여 가구를 집단 이주시켜 농사지을 수 있는 땅으로 개간하며 마을 이름을 한흥동(韓興洞)이라 이름 짓고,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웠다. 이승희는 1916년 2월 70세로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망국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나라가 광복이 되어야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나의 시신을 모셔갈 수는 있겠지만 나의 혼(魂)은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해산 김정묵 스승이 간 길을 따라 이역만리로 망명하다.
스승 이승희가 떠난 후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해산 김정묵은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스승 이승희의 해외에서의 활동은 해산 김정묵에게 망명을 선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1914년 스승 이승희와 함께 한인촌 건설에 집중하다가 김정묵은 1918년 중국북경의 서성중국대학(西城中國大學) 정치학를 졸업하였다.
해산! 독립운동가와 중국인들 사이에 다리를 놓다.
당시 중국은 군부(軍部)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세력들이 할거했던 권력자들인 군벌(軍閥)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김정묵은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이끄는 동북군(東北軍)의 군법처장이 되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군의 고위 장교가 되어 중국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항일지도자들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김정묵과 같은 인물이 가교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만주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은 불가능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로 국내에 한성정부가 13도 대표 국민 대회의 명의로 한성임시정부가 있었고,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분산되고 혼란하게 이루어지는 항일투쟁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3개의 임시정부가 통합하는 노력의 결과 1919년 9월 11일에 중국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고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심산 김창숙, 단재 신채호와 교류하다.
해산 김정묵은 스승 이승희의 제자 심산 김창숙·백남규(白南圭)·유경환(柳璟煥)·이동형(李東瀅) 함께 의정원(議政院) 경상도 의원으로 위촉되었고, 임시정부에서 경상도를 대표하는 의원이 되었다. 김정묵의 상해임시정부 참여는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던 대표적 인물인 백범 김구,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 이시영 등과 교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해산 김정묵은 1920년 말경에는 북경에서 신채호, 김창숙, 남형우 등과 함께 순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하였다. 한편 해산 김정묵은 1921년 5월 신채호(申采浩)·박봉래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발기하였다. 1920년대 초, 만주와 노령에는 많은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으나,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1921년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10개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북경(北京)에 모여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고,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단체의 지휘계통을 통일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총지휘부를 임시정부로 할 것인가, 별도의 군사통일기구를 조직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계속하였다. 회의 중 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있음이 확인되자, 군사통일주비회는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불신임을 결의하고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 때 군사통일주비회의 노선을 지지한 단체가 통일책진회이다. 발기인들은「통일책진회발기취지서」를 작성해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통일적 광복운동을 하고, 둘째 정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시국을 수습하고, 셋째 군사단체를 완전히 통일해서 혈전을 꾀한다.’로 되어 있다.
이 단체의 발기는 군사통일주비회의 움직임과 함께 이승만에게 큰 타격을 주어, 그를 태평양회의 참가를 구실로 상해를 떠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개혁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촉발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이 이끄는 통일책진회의 발기취지는 진정한 독립정신을 발휘하여 민족의 역량을 집결 통일을 강조하며 임시정부 대신에 새로운 정부를 세워 정국을 쇄신하고자 하였다. 또한 군사지휘권을 통일하여 항일독립전쟁에 능률적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다.
천고의 내용은 서울을 비롯한 국내와 중국 각 지역의 독립운동의 현황, 독립선언 지도자들의 옥중 근황,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직후인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간도학살사건(간도참변)으로 동포들의 피해상황, 봉오동전투(1920년 6월)에서 패한 일본군이 중국 마적들을 시켜 만든 훈춘(渾春)사건(1920년 10월초)현지 소식 등을 전하며 동포들에게 독립의지와 무장투쟁의식을 고취시켰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내에는 독립운동노선으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독립노선,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준비를 하여 실력을 먼저 양성해야 한다는 준비론, 무장투쟁을 통한 즉각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신채호·박용만을 중심한 무장투쟁론으로 임시정부 내에서는 노선 투쟁이 격렬하였다.
그리고 1919년 2월에 이승만의 “위임통치사건” 으로 임시정부는 더더욱 혼란상황을 맡게 된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식민지된 조선을 일본이 통치할 것이 아니라 국제연맹이 조선을 위임통치 해 줄 것을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 사건과 그 동안의 독립운동 자금이 명확하지 않게 사용되었다는 의문점들이 등장하면서 임시정부는 갈등의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0년 9월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 대표들은 베이징에서 북경군사통일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부정하였다. 이들은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의 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의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신채호와 함께 무장투쟁노선을 선택하다.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는 독립운동자들이 점차 북경을 중심으로 反임시정부 세력을 형성하며 이들은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방략, 방침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으며, 해외 독립운동의 조직화를 위해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약 5개월 동안 계속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조(改造)와 창조(創造)를 논의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린다.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15인은 1921년 2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는 창립 당시부터 잘못되었으며, 수립 이후 무능과 알력으로 국민의 기대에 이바지할 수 없었다고 비판하면서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전국민의 의사에 기초한 통일적이고 강력한 정부수립과 민족독립운동의 방략을 수립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임시정부의 보완하고 개조하자는 개조파의 대표적인 안창호, 임시정부의 새롭게 창조하자는 대표적인 창조파 신채호, 임시정부를 기존대로 유지하자는 유지파 김구 등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임시정부를 떠나면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이 현저히 약화된 것이 사실이었다.
동생들과 아들 그리고 조카를 김원봉의 의열단에 활동시키다.
해산 김정묵은 단재 신채호와 함께 통일책진회 공동발기인으로 볼 때 독립운동의 사상적 궤적이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장본인이다. 1923년
1월에 발표한 일명 의열단선언이라고 하는〈조선혁명선언〉은 1922년 12월 조선의열단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으로 부터 요청을 받고 완성한 것이다. 일본이 한국 독립운동에서 가장 무서워 한 것이 의열단이다. 당시 김구가 현상금 60만원,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이 100만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100만원을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300억 정도라고 한다.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주의 사상에 무정부주의라고 해석되는 아나키즘(anarchism)이념을 합한 것으로 우리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혁명으로 제거하는 것은 한민족의 정당한 생존 수단이며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준비론·점진론 등은 매국적인 기만성을 가진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신채호는 혁명을 통하여 파괴해야 할 5가지를 제시했는데 첫째, 이족통치의 파괴. 둘째, 특권계급의 타파. 셋째, 경제약탈제도의 타파. 넷째, 사회적 불평등의 타파. 다섯째, 노예적 문화사상의 타파를 제시하였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文化主義)·외교론(外交論)·준비론(準備論)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고,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民衆革命)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수뇌·타이완총독·매국노·친일파거두·적탐(밀정)·반민족적 인물 등을 지적하였고,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1926년 의열단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의열단은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고, 1929년 12월부터는 본격적인 급진좌파의 노선으로 채택한다.
김구·김규식·김창숙·신채호 의열단 고문을 맡다.
1926년 하얼빈에서 해산 김정묵은 신채호가 사상적 기초와 체계를 잡은 의열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그리고 동생들인 김성묵과 김사묵 그리고 그의 아들인 김교삼·김대륙 조카 김교붕을 의열단 활동에 참여케 함으로써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계속적으로 이어나가게 된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길림(吉林)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상해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포섭한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고문으로는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으며, 중화민국총통 장개석(蔣介石)이 지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국독립유일당 운동에 깊이 참여하다.
1926년 한국독립유일당(韓國獨立唯一黨) 북경촉성회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배경과 원인은 1920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이후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일본의 적극적인 무력 탄압과 독립운동단체의 분열로 크게 약화되었다. 1926년 7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립과 각 단체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연설회를 개최하는데 도산 안창호(安昌浩)는 자치론·실력양성론을 타협주의로 규정하고 비판하면서 주의·주장을 초월해 중국국민당과 같은 일대혁명당(一大革命黨)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안창호는 북경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원세훈(元世勳)을 만나 독립운동세력간에 대동단결을 요구한다.
그래서 원세훈은 10월 16일 선언서를 채택하고 한국독립유일당이 만들어진다. 집행위원으로 원세훈를 포함한 7명이 선출되었고, 회원들은 신익희(申翼熙)·김해산(金海山, 善山)을 포함 18명이었다. 10월 28일 회의에서 각지에서의 대독립당 조직운동을 조속히 촉구한다는 뜻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로 개칭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할 것, 한국의 절대 독립을 주장할 것, 한국혁명동지는 당적(黨的)으로 결합할 것, 민족혁명의 유일전선을 만들 것, 전세계 피압박 민중의 단결을 촉구할 것 등의 선언서를 채택하였다.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만들다.
1931년 7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일제는 한‧중 국민의 이간책으로 만보산 사건을 일으켰다. 만보산 사건은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중국 농민과 한인 농민 사이에 일어난 유혈충돌사건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
을 일으키고 1932년 만주국을 건설하여 중국과의 전쟁을 위한 교두보를 만들고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면서 중국에 있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와 역량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악의 역경 속에서도 대담하고 기민하게 대응하는데 그것이 바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다. 한인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여 설립한 특무대(特務隊)라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한민족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고 만보산사건으로 조성된 중국인의 반한(反韓)감정 문제를 해결하고 만주사변으로 조성된 위기의 타결책으로서 1931년 11월 한인애국단이라는 특무대를 설치하여 암살과 파괴공작을 하며 그 대장에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임명하고 모든 활동의 계획·실행·책임을 지도록 결정하였다.
그래서 김구는 1931년 말에 비밀리에 '한인애국단'이라는, 일제 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한 특무조직이자 의열투쟁단체를 만들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단장인 김구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한국애국단 제1호 단원은 이봉창이었으며, 제2호 단원은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이였다. 백범 김구는 한인애국단 특공작전 제1호로서 단원 이봉창(李奉昌)을 일본의 수도 동경에 파견하여 일왕(日王)에게 폭탄테러를 통해 사살하고자 하였으나 폭탄이 불발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는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하자 한인애국단의 다음 특공작전으로 제2단원 윤봉길을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계획 추진한다. 일본군은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무력으로 점령한 후 승리에 도취하여 1932년 4월 29일 천장절(天長節) 일본 천황 생일을 경축일에 일본국의 상해점령 승리를 겸한다는 것을 알고 일본군에게 폭탄투척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해산!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 날 윤봉길의사와 함께 아침밥을 같이 먹다.
윤봉길은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6시경 한인애국단원 해산 김정묵의 집으로 가서 김구·김해산과 함께 최후의 조찬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29일 오전 11시 30분 단상의 사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을 포함한 7명의 군수뇌부들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특공작전에 관계없는 동포들이 체포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윤봉길 의거의 배후는 김구와 한인애국단임을 밝히는 성명서를 각 신문사에 배부하였다.
윤봉길 상해의거는 첫째, 일제의 만보산사건 조작으로 붕괴된 한국과 중국 양민족의 연대를 다시 회복하여 강화하고 중국 영토 안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다시 가능케 하는 여건을 만들
어 주었다. 둘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침체에서 부활시키고 활성화시키는 결정
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셋째, 중국 상해를 침략하여 점령한 일본 상해 사령부 총사령관 이하 군수뇌부에게 큰 타격을 받아 1932년 5월 5일 중국 측과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더 이상의 확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넷째, 침체일로 있던 국내외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독립사상을 강화시키고 고취시켰다는 점이다.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57세로 세상을 떠나다.
해산 김정묵은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했을 때 가족전체를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과 한국독립운동사에 당대 걸출한 백범 김구, 심산 김창숙, 단재 신채호, 약산 김원봉 등과 다양한 민족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는 것을 봤을 때 해산 김정묵, 김해산의 역할은 독립운동사에서 실로 작지 않겠다고 하겠다. 해산 김정묵, 김해산은 1944년 광복을 1년을 남겨두고 중국 북경에서 57세의 나이로 죽는다. 김해산은 이제까지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활약상을 볼 때 베일에 감춰져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뒤늦게나마 해산 김정묵에 대해 학문적으로 조명되는 것이 다행이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구미지역에서 해산처럼 거출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는 것은 한국독립운사에 크나큰 역사적 자랑과 보배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늦게나마 위대한 해산 김정묵을 기리는 행사가 2019년 2월 22일 구미시 임은동에 소재하는 왕산 허위선생기념관에서 왕산 허위선생기념관·한국민족운동사학회 공동으로 “해산(海山) 김정묵(金正默)과 그 집안의 독립운동”이라는 제목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통해 해산 김정묵 그의 족적을 밝히는 행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늦었지만, 다행히이다. 그리고 역사 속에 감춰진 해산 김정묵의 삶의 궤적이 제대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일신상의 부귀영화와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조국과 민족의 독립에 투신·헌신하신 분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회주의 사상인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제국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주의·주장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주 활동 무대가 러시아와 중국이었기 때문에 특히 이러한 사회주의 사상은 쉽게 접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3년동안 남한을 지배하고, 1948년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자유당정권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국가의 제일 임무를 “반공(反共)”이었다. 이후 정권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가 최고의 임무 속에서 민족과 나라가 일제에 빼앗겨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을 전개한 수많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활동했던 인물들을 세상에 들어낼 수도 연구할 수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민족이 36년간 수탈과 착취를 당한 것보다 더 큰 아픔은 민족이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고 이것으로 파생된 역사의 왜곡과 정치의 왜곡이 일어나 지금까지 같은 민족임에도 남북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분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이러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였던 인물들에 대해 연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학계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 역사의 크나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해산 김정묵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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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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