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 칼럼, '고려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우리 한국'
생각해 보건데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세 번 받았다.992년, 1011년, 1019년 세 차례의 전쟁이 그것이다.
1019년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고려를 몹시 두려워하였다.고려는 동북아 정세의 판도를 조정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였다.그러한 연유로 150여 년간 융성시기를 맞이하였다.고려는 송나라, 요나라(거란)에 대한 외교에서 실리를 취하며 국익을 추구하는 외교정책으로 많은 성과들을 거두었다.
조선전기의 학자 눌재 양성지는 고려의 대외정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요나라는 고려를 이웃나라의 예로 대하였다.송나라는 국신사라고 하여 고려를 손님의 예로 대하였고, 금나라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대하였다.'이는 당시 고려의 대외적 국격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훗날 조선의 제 15대 임금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사이에서 실리적 중립외교를 벌일 때인 1621년 6월 6일 "한결같이 고려처럼 한다면 능히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라고 발언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一如高麗所爲, 則庶可保國(일여고려소위, 측서가보국))
귀주대첩으로부터 약 900년이 지나 한국(조선)은 일본에게 병탄 당했다.일본은 가쓰라-테프트 조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것을 승인받았다.드디어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후 토지를 수탈하였고 식량, 원료의 공급처가 되게 하였다.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막대한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하였고 많은 우리농민들은 토지를 잃어 몰락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또 1911년 회사령을 시행해 조선기업의 성장을 막아 민족자본을 억제하였다.헌병 경찰과 한국주차군은 무단통치로 한국을 다스리는 조선총독부의 기반이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정세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론으로 우리민족도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아 범민족적인 기미년 삼일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7500명의 사망자(일본측 추산)가 발생한 만세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3.1만세혁명 직후 우리는 상해에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우리의 역량을 극대화시켰다. 한국의 저력을 무서워하는 일본은 무단통치를 종식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물론 이것은 회유의 목적을 가진 표면적 양보였다. 문화정치의 뒷면에는 비열하고 악랄한 본격적 수탈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인 2019년~2020년 기해년, 경자년에는 일본이 경제왜란을 일으켜 의외의 결과를 보게 하였다. 오히려 우리의 경제는 튼튼하여 일본의 경제침략에도 끄떡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코로나19 사태의 모범적인 극복을 통해 세계의 선도국 위치에 올라서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돌이켜보면 일본은 항상 국가내부의 위기 때마다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문제의 방향을 대외로 돌렸다. 임진왜란이 그랬으며, 명치유신 후 1910년 경술국치, 1923년 관동대지진이 그랬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대외정책을 이이제이로 일관했듯, 일본도 늘 그래왔다.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도 끝없는 것이지만 그 기저에 깔린 우리에 대한 두려움 역시 끝없는 것이다.
적국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가 발전한 과거를 한번 복기해 보는 것 역시 역사를 읽는 보람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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