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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 칼럼, "고려충신 오윤부伍允孚 (생년미상~1304)" 1부

이순락기자 0 1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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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생애-

 

고려 초기를 풍미한 인물 중에 최응과 최지몽, 진함조 등은 유학을 겸비한 관료로서 천문학과 역학에 능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황실과 조정의 자문역할을 맡아보기도 했다. 특히 최지몽 같은 이는 고려 건국시기부터 6대임금 성종 왕치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왕의 꿈을 해몽해주거나 천문과 역학으로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했었다. 현종대에 활약한 진함조(晉含祚)와 같은 이는 현종 왕순의 스승으로 예우받기도 했는데 이들은 주로 사천대에서 근무를 하였다.

 

사천대의 주요업무는 천문(天文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일을 맡아보았거니와 역서(달력)를 편찬하며 날씨를 관측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상청, 천문대와 같은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기 시작하자 조정의 모든 관제가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이 때 사천대는 관후서(觀候署)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후에 사천감으로 바뀌게 된다.

 

고려 충렬왕 왕거 시기에 천문관으로 크게 활약한 사람은 오윤부라는 사람이었다. 오윤부는 부흥(황해도 배천)사람으로 부흥오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대대로 태사국의 관리를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그 역시 태사국의 관리가 되었다. 충렬왕 때 이르러 지태사국사, 판관후서사 등을 역임한 그는 점성에도 능통해 왕실과 국가대사의 길흉을 점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심지어 원나라 세조 패아지근 홀필렬(쿠빌라이)이 내안(乃顔:나얀칸국)을 정벌할 때 오윤부를 불러 점을 치게 해 시험해 보기도 하였는데 이 일이 성공하자 그는 더욱 명성을 떨쳤다.

 

고려사에 '매일 밤 한 잠도 자지 않고 별자리를 살펴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병으로 앓지 않으면 하룻밤도 빠진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오윤부는 매우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여 충렬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용모가 못생기고 초라하며 말수와 웃음이 적었다 하는 그는 천문을 관측하고 점을 칠 때는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으며 혹독한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한 오윤부를 두고 충렬왕은 '오윤부는 나의 최호(중국 북위사람)이다! 얼굴은 비록 못생겼으나 버릴 수는 없는 사람이다'라 할 정도로 충렬왕은 그를 매우 아끼었다. 오윤부는 나랏일을 자신의 걱정처럼 여겨 나라에 그것을 점쳐 나라에 재변이 있을 때마다 들어가 왕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아뢰는 말은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한다.

 

한편 충렬왕의 왕후 제국대장공주(장목왕후)는 원나라 세조의 딸로 고려에 시집와 충렬왕보다 더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장목왕후는 원의 힘을 믿고 충렬왕을 강하게 압박하여 자신의 뜻대로 국사를 처리하는 등 국정을 농단하기도 했다, 안하무인의 성격을 가진 장목왕후를 유일하게 막을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오윤부였다.

 

일례로 127610, 충렬왕이 부왕이자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때 원종의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그 행사는 오윤부가 주관하였는데 장목왕후가 참석하자 오윤부는 불측한 염려가 있을까 두렵다고 하여 왕후의 참여를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은 항원의식을 가진 고려인들을 대변한 것이다.

 

원나라는 40여 년간 고려를 침략하였다. 국력의 중과부적으로 고려는 스스로 원에게 항복하여 복속되었다. 부마국이 된 후, 원에서 온 왕후는 고려의 정치를 간섭하였고 국가의 제사의식마저 마음대로 하려 하자 오윤부는 고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제국대장공주를 만류한 것이었다. 그 후인 12784월에는 제국대장공주(장목왕후)가 재신과 추신을 불러서 택일하여 궁실을 짓게 하였다.

 

이에 오윤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년에 토목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왕께 불리하니 신이 감히 택일 할 수 없습니다.'

오윤부의 제지를 받은 공주는 크게 노하여 그를 파직하고는 매까지 때리려하였다. 제국대장공주는 자신보다 23살 연상인 경효왕(景孝王:충렬왕)까지 때릴 정도로 성격이 드센 사람이었다. 이런 제국대장공주에게 매를 맞으려 할 때에 마침 어느 재상이 애써 제지하여 큰 곤욕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제국대장공주는 경효왕에게 끈길기게 요청하여 결국 오윤부는 매를 맞게 되었다. 그는 매를 맞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택일하는 것은 흉()을 피하고 길()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의 위상이 날로 격하되어 갈 때 원나라 공주가 고려에 시집을 와서 행패를 부리며 국고를 낭비하려는 것을 막은 사람이 바로 오윤부였으니 그는 과연 고려의 충신이었다.

 

도경당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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