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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칼럼 "알아야 이긴다"

이순락기자 0 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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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 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임진왜란 당시 의정부영의정과 4도 도체찰사로서 국난극복에 앞장 선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은 전란 후, 지난 일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앞일을 철저히 경계한 기록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다.

징비록의 처음은 1586년 일본국 사신 귤강광(橘康廣)이 관백 풍신수길의 국서를 지니고 조선에 들어온 일부터 다루었다.

이어 당시로부터 백년전에 영의정을 지낸 범옹 신숙주(泛翁 申叔舟)의 유언을 기록하였다.

1475년 6월 범옹이 59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기 직전 성종임금이 문병하여 국가를 위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는지 물었다.

그러자 범옹은 일본과 실화(失和:평화를 잃는 것)하지 말라고 하였다.

 

서애는 왜 징비록의 초장에 범옹의 유언을 실었을까?

더군다나 범옹은 세종의 유지를 저버린 채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도운 일로 당대의 사림들에게 변절자로 낙인찍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변절자의 유언을 서애가 비중있게 서술한 것은 참화를 겪은 후 그만큼 범옹의 식견과 통찰력을 높이 산 것이었다.

사실 범옹의 유언은 틀린 것이 없었다.

조선개국 후 화이관을 바탕으로 사대교린 정책을 행한 조선은 도무지 일본의 내부 사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왜구의 준동을 억제하는 것에만 그치고 말았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사신의 파견(조선 통신사)도 1443년 이후 끊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범옹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1479년 이형원 등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바닷길이 멀고 험하다는 이유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마침내 통신사 파견은 중지되고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의 공식적인 접촉이 없었다.

 

한편 범옹은 1443년 통신사 서장관이 되어 정사 변호문, 부사 윤인보를 따라 일본에 들어가 사신의 임무를 다하였다.

월등히 뛰어난 조선의 문화와 학문 그리고 범옹의 빼어난 시문솜씨에 일본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 들어 한류에 열광하였다.

범옹은 9개월간의 서장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그 경험을 토대로 30년 후인 1471년 왕명에 의해 견문록을 저술하였다.

이것이 바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이다.

해동제국기는 일본, 유구국 등 즉 바다건너 동쪽의 여러나라에 대한 역사, 국정, 지리, 문화, 풍속 등을 기록한 것으로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일본을 알수 있는 유일한 정보서적이었다.

 

1443년 이후, 통신사 파견이 중단됨에 따라 1590년까지 150여년간 조선은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떤 일어나는지 그 내부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일본에서 조선으로 사신이 올 뿐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란 칼잡이 녀석이 나무장사를 하다가 직전신장(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출세하여 어쩌다 권력을 잡아 난립된 일본전국을 통일하였다는 난데없는 소식을 조선에 전하자 조선으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더욱이 일본은 일본대로 "우리는 자주 조선에 사신을 보내는데 조선은 우리를 무시하여 사신조차 보내지 않는다."라며 전쟁위협을 동반하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재촉하였다.

일본의 요청이 거듭되자 1590년 마침내 조선조정은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 허성을 서장관으로 하여 통신사로 보낸다.

150여년만에 조선 사신이 일본으로 간 것임에 따라 앞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인지의 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서애가 징비록의 초두에 범옹의 유언을 강조한 이유는 임진왜란의 원인을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지 못한 것에서 찾고 있거니와 무엇보다 일본에 대한 정보가 빈약하며(부재) 알지 못하는 것(무지)을 중요하게 인식한 점이다.

현재 일본은 기해년 경제왜란을 일으켜 한일관계가 파탄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일본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시시각각의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그토록 조선과 중국의 역사에 매달리며 연구하고 역사는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정보를 얻은 것 역시 경계로 삼아야 할 일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나를 알고 적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 도경당 류돈하 쓰다 ~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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